예로부터 미술가들은 작업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떠오르는 생각들과 일상의 단편들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해왔다. 스케치, 드로잉, 에스키스의 의미를 조금씩 다르게 구별하기도 하지만 어쨌건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용도로 스케치, 드로잉, 에스키스가 적극 활용되었으며 아이디어 노트북과 연필이 항상 함께 했다.
카메라가 삶 깊숙이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일상을 사진으로 기록하기 시작하였으며 미술가들도 아이디어 스케치와 더불어 사진 이미지도 많이 활용하게 되었다. 디지털 미디어가 대중화되고 소셜 미디어에 사진을 올리는 행위가 대중화될수록 카메라는 명실공히 일상의 대표적인 매체로서 더 많은 것들을 대체해 나갔으며, 이제는 동시대인들의 삶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실존하는 대상과 시간을 찰나의 순간에 포착하는 사진은 사유와 지각을 통해 배출된 결과물(김지영, 2012)이자 사유의 매체이다.
김지윤 작가는 실제로 본 풍경을 화폭에 옮길 때 현장에서 직접 찍은 사진들에 기초한다. 사진을 활용한다는 것은 김지윤 작가뿐만이 아니라 지금의 미술가들에게 있어 너무나 자연스러운 과정이자 활용의 일면이다. 작가는 사진이 단편적인 기록일 뿐이기 때문에 이를 활용한 회화 작업에서는 당시 체험했던 심상들을 더해 작업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진에서 기록의 기능은 사진만이 지닌 훌륭한 속성이자 특성이므로 이를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중요하다.
처음 카메라가 나왔을 때 순간을 영원으로 변환시키는 필름 카메라는 인위적인 가감 없이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여 수많은 의미와 감정 표현을 전달하는 데 최적으로 환영받았다. 이후 등장한 디지털카메라는 바로 확인하고 또 바로 지울 수 있는 신속성과 이미지 편집의 편리성 때문에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쏟아붓는 정성과 노력이 필름 카메라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어지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사진 이미지는 개별적인 작품이라기보다는 일상의 기록이라는 의미가 더 강해졌다.
김지윤 작가가 찍은 풍경 사진은 구도, 노출, 초점을 맞춰서 완벽한 사진을 찍고자 했던 필름 카메라의 그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으로 찍은 연속 이미지였을 것이며, 따라서 거기에 마음을 담아 담편적인 기록 이상의 것을 포착하려 했던 예전 사진의 의미와는 달랐을 것이다. 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미술가들을 포함하여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일할 것이다. 또한 디지털 방식으로 넘어오면서 일상 그대로의 온전한 포착보다는 소셜 미디어용으로 업로드하기 위하여 다분히 연출에 의한 설정 샷의 선호로 이러한 목적용이 더 가속화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작가가 생각하는 사진에 대한 것은 바로 이러한 디지털카메라 혹은 스마트폰 촬영을 통해 드러나는 일상 그대로의 흘러가는 단편적인 하나의 이미지에 국한된 것이라 보인다. 물론 그 당시 찍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찍는자의 심상은 사진에 드러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찍은 사람만이 기억할 수 있는 개인적인 것이겠지만, 이러한 간극의 변환에 따른 이미지의 변형과 투입은 스케치, 드로잉, 에스키스이건 사진을 거쳐 작업을 완성하건 상관없이 미술에 있어서는 새삼스럽지 않다.
작가의 (2021) 전시 서문에 < 핸드 투 핸드 > 제목의 비평문을 실은 신지현 큐레이터는 작가의 작품에 있어 실제의 경치와 디지털 투사 사이에 기억, 서사, 조정과 실험이 존재함을 말하였다. 여기에서 논하고 있는 실제 대상의 이미지 변형과 이를 통해 다시 원본이 되는 작품의 진정성과 진실성은 시뮬라크르에 기반한다. 이는 작가의 (2022) 전시에 < 움직이는 형식의 값 >을 제목으로 비평한 정희라 큐레이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는 매체를 통한 회화의 재현이 중점적으로 논의되었는데, 다분히 시큘라크르에 기반한 관점을 찾아볼 수 있다. 실재하는 대상을 그대로 담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동원하여 변형을 통해 대상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 미술이라면, 그 변형의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건 간에 새로운 해석을 담아야 한다. 그런데 두 비평가는 원래 말하고자 했던 의도보다는 작가와의 깊은 대화를 통한 논의에 기반하여 논지의 흐름을 잡았기 때문에 실재의 복사, 카메라의 개입, 디지털 디바이스, 실견과 디지털 투사, 변형되는 이미지 등을 논하면서 사진의 이미지를 변형하는 데 더 중점을 두어 논했다고 판단된다.
스케치, 드로잉, 에스키스뿐만 아니라 디지털 카메라나 스마트폰을 활용하여 포착한 이러한 이미지들에는 그 자체로 부분적이지만 그 목적에 충실하게 존재하는 파생된 심상이 존재한다. 작가는 여기에 움직임에 따른 속도감, 시각적 질감, 화면 구성을 위한 적절한 비율과 배열을 더한다. 이는 움직이지 않는 풍경이나 정물일 때 작가에게 온전히 변형을 허락하는데, 혹시 움직이는 대상을 소재화할 때 다시 움직임에 따른 속도감, 시각적 질감, 화면 구성을 위한 적절한 비율과 배열이 더해진다면 오히려 작가가 원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더 정확히 얻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 말은 대상을 움직이지 않는 풍경으로 정하건 움직이는 사람으로 정하건, 아니면 어떤 디바이스로 포착하건 건에 작가는 이미 대상에 대하여 감정 이입을 하고 있으며 이를 자기화하는 과정을 통해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다양한 디지털 이미지들 속에서도 이미 작가의 대상에 대한 선택이 진행되었으며 이에 몰입하여 대상을 작업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유하는 방식이 사진을 통해 투여되었다는 말이다. 앞으로 작업을 위한 구체적 방법에 대한 논의보다는 명멸하는 빛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대상이나 그 물성 속에서 빛을 발하는 미술에 더 집중을 둔 논평들이 나오기를 바란다. 작가도 결국 그 의도로 작업을 하지 않았을까.
월간전시가이드 2023_4월호 中 이주연 칼럼